도산 안창호 청년학우회 몽골의 슈바이처 이태준
대암 이태준
AI 개요
과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몽골은 인구의 절반 이상이 매독에 감염되며 국가적 멸종 위기에 처한 바 있습니다. 몽골 역사 라마 불교의 승려들이 가졌던 초야권 등 여러 사회·문화적 요인이 주된 원인이었습니다. 몽골 역사 독립운동가이자 의사였던 이태준 선생이 몽골에서 대규모 병원을 설립하고 매독 퇴치에 크게 기여한 역사가 유명합니다.
질병의 개요 및 전파
매독은 스피로헤타과에 속하는 세균인 트레포네마 팔리둠(Treponema pallidum)에 의해 발생하는 성매개감염병입니다.
주요 전파 경로: 감염된 사람과의 직접적인 성적 접촉, 점막 접촉 등을 통해 전파됩니다.
증상: 감염 부위에 통증이 없는 궤양(경하감)이 생기는 1기, 발진이나 발열, 림프절 비대 등이 나타나는 2기, 이후 증상이 없는 잠복기를 거쳐 장기로 진행될 수 있습니다.
진단 및 치료
매독은 발견 시 초기에 간단한 방법으로 완치가 가능합니다.
진단: 혈액 검사를 통해 매독균에 대한 항체를 확인합니다.
치료: 페니실린 등 항생제 주사 치료가 표준 요법으로 사용되며, 치료 후에도 정기적인 혈액 검사를 통해 완치 여부를 확인해야 합니다.
대암(大岩) 이태준(1883~1921)은 세브란스의학교를 졸업한 의사이자 독립운동가입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몽골로 망명한 그는 동의의국(同義醫局)을 세워 의술을 펼치며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고, 몽골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려 헌신했습니다. 그의 주요 활동과 업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독립운동에 투신: 세브란스 의학교 재학 중 도산 안창호의 감화를 받아 독립운동에 뜻을 품었습니다.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자 1912년 중국 난징으로 망명한 후 몽골로 건너갔습니다.
몽골의 '신의(神醫)': 몽골에 만연했던 매독 등 감염병을 치료하며 몽골인들을 구했습니다. 뛰어난 의술로 명성을 떨쳐 몽골 마지막 왕인 복드 칸(Bogd Khan)의 어의(주치의)가 되었고, 몽골 최고 국가 훈장인 '에르데니인 오치르'를 받았습니다.
독립운동의 거점 마련: 의사로 벌어들인 막대한 수익을 상하이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단체에 지원했습니다. 김규식과 함께 몽골을 독립운동 기지로 만들려 했으며, 의열단 활동을 하며 폭탄 제조 기술자를 김원봉에게 소개하는 등 항일 운동의 핵심 통로 역할을 했습니다.
비극적인 최후: 1921년 러시아 백위파(반혁명군)가 몽골을 침략했을 때,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지키려다 38세의 젊은 나이에 피살되어 순국했습니다.
오늘날 몽골 울란바토르 자이승 전망대 인근에는 이태준 선생을 기리는 이태준 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그의 헌신은 한국과 몽골 양국 우호의 상징으로 남아있습니다.
대암 이태준 기념관 - http://leetaejoon.com/wp/?page_id=2428
약력 및 생애
신의[神醫]라 불린 애국지사 대암 이태준 선생

약력
선생은 김필순, 주현칙과 함께 안창호 선생이 만든 “청년학우회’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대암 이태준 선생은 아버지 이질(李瓚)과 어머니 박평암(朴平岩) 사이에서 1883년 11월 21일에 경남 함안군 군북면 명관리 1149번지에서 출생하였다. 자(字)는 원일(元一) 호(號)는 대암(大岩)이다. 인천이씨 (仁川李氏) 족보에는 이태준 선생이 “뜻과 기개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인물이라 기록하고 있다.
선생은 어린시절 고향 도천제(道川齊)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1907년 세브란스의학교(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에 입학하여 1911년에 제 2회로 졸업하였다.
선생은 김필순, 주현칙과 함께 안창호 선생이 만든 “청년학우회’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세브란스 인턴으로 근무하던 중 1912년에는 중국 남경으로 망명하여 ‘기독회의원’에서 의사로 일을 하다가 처사촌이 된 애국지사 김규식 선생의 권유로 1914년에 몽골 후레로 가서 ‘동의의국’ 이라는 병원을 개설하였다.
특히 ‘화류병’퇴치에 앞장섰고, 몽골 마지막 황제 주치의가 되었으며, 1919년에는 동골로부터 ‘오르데니-인 오치르’라는 최고의 훈장을 받았다.
1921년 2월 당시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러시아 백위군 운게른 부대에 의하여 피살당하니 38세의 아까운 나이였다. 선생의 묘는 성산인 보그트산에 있다고 전하며, 1980년 한국정부는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생애
1883년 11월 21일
–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명관리 1149번지에서 부친 이질(李瓆)과 모친 박평암(朴平岩) 사이에서 출생.
연도 미상
– 부인 안위지(安渭址)과 사이에 두 딸 수남(1904년. 6월 17일생)과 수용(1906년 5월 22일 생)을 낳음.
1907년 10월 1일
– 세브란스 병원 의학교 입학.
1910년
– 안창호의 권유로 청년학우회에 가입.
1911년 6월 21일
– 세브란스 연합의학교 졸업 후 세브란스 병원에서 근무.
1911년 12월 31일
– 김필순과 중국의 혁명에 위생대로 참여하기로 하고, 김필순 배웅 직후 중국 난징(南京)으로 망명.
1912년 6월경
– 망명 후 중국 난징에서 기독회의원(基督會醫院)에서 의사로 근무.
1914년경
– 비밀군관학교 설립을 위해 김규식(金奎植), 서왈보(徐曰甫)와 동행하여 몽골 울란바타르(庫倫)로 갔으나 국내로부터의 자금이 오지 않아 실행치 못하고 동의의국(同義醫局) 설립 / 보그드 칸의 어의가 됨.
1915년
– 서간도 신흥교우단에 후원금(5角) 전달 ( 『신흥학우보』 1915년 9월 15일 자에 보도).
1918년 여름
– 김규식과 동행한 그의 사촌 여동생 김은식(金恩植)과 결혼.
1919년 1월
– 프랑스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로 파견된 김규식에게 여비(2천달라) 지원.
1919년 7월
– 몽골 국왕 보그드 칸(Bogd Khan)의 어의(御醫)로 활약하며 몽골인들에게 ‘박시제중(博施濟衆)’한 공(功)을 인정받아 외국인에게 수여하는 1등훈장 ‘에르데니-인 오치르’(귀중한 금강석)‘라는 명칭의 훈장을 받음.
1919년 9월
– 『독립신문』에 은(銀) 10원 의연(義捐)함.
1919년 11월
– 한인사회당에 비밀연락원으로 가입.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의관(軍醫官) 감무(監務)에 선임됨.
1920년 5월경
– 울란바타르를 경우하여 모스크바로 가던 임시정부 모스크바 특사 한형권에게 숙식과 교통편의를 제공하고, 여비 대양(大洋) 100원 지원.
1920년 3월
– 한인사회당 코민테른 파견대표 박진순과 상해임정특사 한형권에게 숙식 및 편의 등 지원함.
1920년 10월
– 코민테른 자금 8만 루블 상당의 금괴를 상하이로 성공적으로 운반함.
– 의열단 단장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함.
– 운게른-스테른베르그의 부대가 고륜을 공격함.
1921년 2월
– 몽골을 점령한 러시아 백위파 운게른 스테른베르그(Ungern Sternberg) 군대에 체포되어 연금중 순국.
1990년
–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됨.
2000년 7월
– 몽골 울란바타르에 이태준 기념공원 조성.
2010년 6월
– 몽골의 이태준 기념공원내에 이태준 기념관 건립.
2021년 11월
– 경상남도 함안군에 대암 이태준 기념관 개관